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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10

 

"히로, 일어나. 아침먹자. 응? 우리 오늘 일찍 나가야 하잖아."

 

 

  코우지는 자신의 품에 꼭 안겨 새근새근 옅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에 취한 히로를 살짝 흔들었다. 오늘은 조금 늦은 아침부터 일이 꽉 차있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아침식사는 그대로 포기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걸러서는 안 되니까. 코우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히로를 깨웠다. 하지만 히로는 늘 그렇듯 어리광을 부리며 코우지의 품에 꼭 안겨 중얼거렸다.

 

 

"으으응. 이대로. 조금만 더 있을래. 코우지가 너무 따뜻해애."

 

 

  히로는 말끝을 늘리며 코우지의 허리를 꽉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코우지는 머리로는 그를 떼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귀엽게 애교를 떠는 자신의 애인을 보자니 놓아주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매일 고민 되는 순간이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이대로 히로를 껴안고 자고 싶은데.

코우지의 내적 갈등이 한창 깊어가던 중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코우지는 히로의 허리를 꼭 붙잡고 있던 손을 아쉬운 마음으로 빼내고는 침대 옆 서랍을 향해 뻗고 더듬거렸다. 곧 손에 잡힌 전화기를 귀 가까이 갖고 와 수신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어, 이거 하야미씨 전화인데 미하마씨가 받네요?

 

 

  코우지는 아차 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것은 어젯밤 작업방에 두고 그대로 나왔다. 커플폰으로 맞춘 터라 헷갈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평소에 촬영 스탭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오는 경우는 대체로 지인들뿐이라 방심했다. 코우지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켜 말을 갖다붙였다.

 

 

"아, 히로가 요즘 아침을 굶길래, 아침 해주러 잠시 들렀거든요. 지금 샤워중이에요."

 

 

-아하, 하긴 하야미씨가 생활력 은근 없는 거야 팬들도 다 아는 사실이죠. 미하마씨가 고생이 많아요.

다행히도 그냥 넘긴 모양이었다. 코우지는 한숨 돌리며 전화한 이유를 물었다.

 

 

-아, 맞다. 내 정신봐. 저희 오전 스케쥴 취소되었어요. 오늘 새벽에 갑자기 좀 꼬여서... 매니저분께 전화 드리려니까 왜인지 모르겠는데 안 받아서요. 헛걸음 하면 안 되니까 하야미씨 전화 드리고 미하마씨한테도 전화 드리려 했죠.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셔요."

-뭐 원래 연말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하.

 

 

  간단한 안부인사를 나눈 후, 전화는 끊어졌다. 코우지는 다시 폰을 원래 자리에 두고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사라진 스케쥴에 급 여유로워진 터일까. 히로는 어느 새 베실베실 웃으며 다시 잠결에 빠져들고 있었다. 코우지는 그런 히로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부딪혔다. 히로는 곤두선 감각에 살짝 움찔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코우지는 히로를 내버려두고 자신도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이제 곧 더 바빠져 이런 휴식을 즐길 시간도 없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렇게 코우지는 눈을 슬금슬금 감았다.

 

 

'안녕하세요. 산타할아버지. 저는 하야미 히로. 10살이에요. 저는 얼마 전에 산타할아버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엄마와 같이 보내고 싶어요. 이게 제가 원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1년 동안 울지도 않고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꼭 선물을 보내주세요.'

 

 

  코우지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귓가에 방금 울렸던 소리는 무엇일까. 분명 히로가 말한 것 같았다. 지금 보다 훨씬 어린 음색이지만. 하지만 히로는 여전히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들은 목소리는 무엇일까. 단순한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선명했고 실감났다. 그렇다고 현실이라고 하자니 지금 갑자기 히로의 10살 시절의 말이 제게 들릴 이유도 없었다.

코우지는 당황스러워 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앉아 방금 전의 소리가 환청인지 아닌 지 고민에 빠졌다. 히로의 팔이 그의 허리를 엉겨오는 것도 모른 채.

 

 

D-6

 

 

'산타할아버지. 올해는 다른 소원을 빌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 코우지와 영원히 함께하게 해주세요. 이게 제가 원하는 소원이에요.'

 

   

  또 이 소리였다. 며칠 전의 일을 기점으로 매일 아침마다 이 목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히로의 크리스마스 소원. 하루에 한살씩 먹어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14살. 자신이 히로와 처음만난 해였다.

코우지는 마른세수를 했다. 왜 자꾸 이 목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코우지는 잠을 자도 자는 기분이 아니었다. 일어났을 때의 상쾌함은 사라지고, 매일 아침마다 가슴이 찢어질듯 아림을 반복하니 괴로움만 제 가슴을 쳐대는 것이었다. 전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히로의 옛 아픔들을 하루하루 꺼내놓으며 코우지의 숨통을 조이는 모양새였다. 잔인할 만치.

  지난 며칠 히로는 매 해 크리스마스마다 비슷한 소원을 빌어 왔던 모양이었다. 엄마를 보게 해달라고, 엄마와 만나고 싶다고, 엄마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전부 단순한 소원들이었다. 아마도 그녀와의 연이 끊어지고 매일같이 기다렸던 것일 테지. 그 낡은 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코우지는 히로의 외침을 듣고 일어나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 어린 아이가 제 엄마를 찾는 소리가 안쓰럽고 또 그 아이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라는 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목이 메이게 만들었다.

  히로의 눈물은 코우지에게 독약과도 같았다. 머금으면 머금을수록 제 안을 후벼 파고 들어와 눈물샘을 찔러대는 것이 분명 독이 틀림없었다. 저 마냥 울어달라고. 코우지 자신이 모르던 히로가 몸부림치며 버텨왔던 가시들이 마치 미뤄두었던 숙제들을 풀라는 마냥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코우지는 사실 히로의 엄마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쨌든 책임감이 없었던 것이고. 다만 히로가 그렇게도 정을 못 떼니 별 말을 할 수 없었던 것 뿐.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히로가 흘린 눈물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알게 되니 부아가 치미는 것이었다. 머리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며든 독이 제 마음까지 조종하는 모양인지 이성이 마비되고 마는 것이었다.

  어젯밤만 해도 코우지는 히로가 그녀와 통화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전화를 뺏어 탁 끊어버리고 말았다. 당장의 속은 후련했지만 그 후 히로의 반응을 보고는 아차 하였다. 코우지는 에둘러 자신의 충동적 행위를 변명하였다.

 

'그, 히로 오늘 피곤하잖아. 지금 늦은 시간이고.'

 

  히로는 입을 열다 다시 다물었다. 히로도 눈치 챈 것이다. 최근 코우지가 이상하다는 것을. 히로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은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그때는 뭐라 해야 할까. 코우지는 히로가 잠들고 나서도 쉽사리 신경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내일도 엄마에 대한 소원이라면 정말 더는 못참을 것 같은데. 그렇게 애달프게 찾던 사람을 그녀는 어찌도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었단 말일까. 코우지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다행인지, 14살의 소원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코우지 자신이었다. 이 시절은 아직 친구. 히로의 안에서 코우지는 그렇게 정의되어있던 모양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점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시절의 히로가 생각나 귀여우면서도 약간은 아쉬웠다. 사실 코우지는 히로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의 영혼에 홀려버렸으니 말이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조금 더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마음의 중력이 온통 그를 향하고 있었음은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는데.

 

 

"코우지, 요즘 피곤해? 통 못 일어나네. 내가 몇 번이나 깨웠었는데."

 

 

  히로가 얼굴에 미처 닦아내지 못한 촉촉한 물기를 떨어트리며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코우지는 고개를 저으면서 히로의 볼을 적시는 촉촉한 물기를 손으로 쓱 닦아내주었다. 맨들한 볼이 약간의 복숭아 빛을 띠는 것은 매일 보아도 질리지가 않았다. 코우지는 백번의 말 대신 그 위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차마 매일 아침마다 네 크리스마스 소원을 듣느라 제대로 된 기분으로 일어나질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분명 그 말을 듣는다면 히로는 애써 잊고 지냈던 일들을 하나씩 꺼내볼 텐데. 그가 다시금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은 좀 좋아 보인다. 조금만 더 버티자. 우리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랑 당일은 일부러 스케쥴 쫙 빼놓았잖아. 대신 지금 이렇게 무리하는 거지만."

  히로의 말 대로였다. 둘은 어떻게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보겠답시고 이렇게 꽉 찬 스케쥴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이 조차도 거절당할 뻔 한 것을 히로가 열심히 딜을 해낸 결과였다. 그만큼 히로는 크리스마스를 기대 중이었다. 그런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은 코우지는 결국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 코우지가 원하는 것은 히로의 웃는 얼굴이었으니까.

 

 

D-5

 

 

'산타할아버지. 코우지, 코우지랑 제가 영원히 함께 하게 해주세요. 제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 그가 행복할 수 있게 해주고 영원히 저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코우지는 오늘도 여김 없이 히로의 소원과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시계를 보니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난 모양이었다. 제 옆에 아직 히로가 누워 있었다.

조금 전 들린 것은 15살의 히로의 목소리였다. 코우지는 베실베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이때는 한창 자신과 그가 서로 사랑을 확인했던 시기였다.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차곡차곡 쌓여간 추억은 사랑의 새싹을 예쁜 꽃으로 피워냈다. 이때면 한창 그랬을 시기다.

  오랜만에 떠올린 그 어리던 시절들이 가슴 한 자락을 간지럽혔다. 그저 손만 잡고 있어도 좋았던 때였는데. 코우지는 아직 잠들어있는 히로의 손을 살포시 잡아보았다. 따뜻한 감촉이 신경선을 타고 차올랐다. 여전히 좋았지만 그날의 그 벅차오르는 감정만큼은 아니었다. 아마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그 시절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지금은 손을 잡으면 껴안고 싶고, 껴안으면 입 맞추고 싶고. 어린 자신은 상상도 못할 만치 엄청난 욕심쟁이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코우지? 뭐해?"

 

 

  코우지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히로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히로는 빈 한손으로 눈을 비비며 물어왔다.

 

 

"응, 그냥 손이 잡고 싶어서."

"우리 이렇게 손만 잡고 있는 거 엄청 오랜만이다. 그럴 나이는 지나선 가."

 

 

  히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눈꼬리가 곡선으로 휘었다. 코우지는 이러니 손만 잡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터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자꾸만 욕심나게 행동하는 히로의 모습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이렇게 잡고 있으니까 좋다."

 

 

  히로는 코우지의 손을 꼭 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여유로운 모습과 대비되는 그 시절의 새빨간 볼과 떨리는 눈동자가 떠올랐다. 서로가 제 감정을 주체 못하고 닿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워하던 시절. 그 시절의 자신들이 감히 이런 오늘을 상상이나 했을까.

  오늘의 목소리는 지금껏 중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덜어 가벼워졌다. 어쨌든 지금은 그가 행복하잖아. 그러면 된 거지. 코우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히로의 손을 꽉 부여잡고는 아직 조금의 여유가 남은 아침시간을 보냈다.

 

 

D-4

 

 

'코우지를 돌려주세요. 그거면 되요.'

 

 

  그 여태까지의 말들보다 가장 짧은 말. 하지만 그 한마디는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코우지는 어제의 행복은 오늘의 괴로움을 위해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지워버린 것 이었다.그 후 닥쳐왔던 자신과 히로의 가장 슬펐던 시간을.

  16살. 그것은 이별의 순간이었다. 애써 잊고 지냈던 기억이 머릿속에 촤르륵 펼쳐진다. 사실은 코우지에게 그 날의 기억은 흐릿한 잔상뿐이었다. 울리는 카메라소리, 히로의 단호한 외침, 그리고 뒤돌아서는 자신. 단편적 조각들이 모여 유리조각처럼 제 심장을 베어낸 듯 구멍이 뻥 뚫리고 있었다. 아니 이미 뚫렸던 구멍을 겨우 메워놨더니 마치 신기루마냥 전부 사라진 기분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상실감만이 몰아닥쳤다. 그 날은 그에게 있어서 종말의 선고였으며, 그 해는 모든 나날들이 최악의 나날로 기록 되었다. 최악의 가을, 최악의 할로윈, 최악의 첫눈, 그리고 최악의 크리스마스.

  코우지는 밀려오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히로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간 뭐라 할 말이 없었으니까. 화장실 문을 꼭 잠그고서야 참았던 눈물이 화르륵 타오르듯이 뜨겁게 흘러내렸다. 16살의 자신이 매일같이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그 시절처럼.

  그러고 보면 히로가 16살을, 그리고 17살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한 번도 물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스쳐가듯 딱 한번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정말 그땐 그랬지의 지나가는 말이었고 코우지 역시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려 했었다. 그러나 히로의 반응은 석연치 않았다. 그는 애매하게 웃으며 답을 회피하였다.

 

'그냥, 데뷔 준비로 바빴지 뭐.'

 

  별 것 아닌 말이지만 무언가가 비틀려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코우지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것이 예의니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켜버렸다. 히로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캐묻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붙여가며 스스로를 자상한 자신으로 포장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작 히로의 감정들 중 한 조각만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포장은 쉽사리 벗겨지고 말았다. 코우지는 외면했던 스스로의 이기심을 마주하였다. 히로가 아픈 것은 항상 다른 이 때문이고 저는 히로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는 그런 자기 멋대로의 도취감에 빠져있던 것이다. 결국 히로라는 개인에게 있어서 코우지나 그의 엄마나 똑같았다. 어쨌든 자신의 입장에서는 떠나간 사람이었고 히로는 상처 입었다.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생각하냐의 문제였다.

  히로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다 잃은 마냥 잠겨있었다. 그 어느 때조차도 그렇게 영혼이 사라진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는 희망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늘 꿈으로 가득 차있었고 아무리 외로울 지라도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사람이었다. 분명 15살까지의 그는 그랬단 말이다. 그런데 저것은 소원이 아니었다. 희망이 담긴 목소리가 아니라 체념이었다. 그 곳에는 히로의 영혼이 없었다.

 

 

"코우지. 아직 멀었어? 우리 이제 씻고 나갈 준비해야 하는데."

"아 미안. 히로 조금만 더 누워있어. 어서 씻고 나갈게."

 

 

  한참을 울었을까. 히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우지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잠긴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대답했지만 어쩌면 들켰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로는 잠깐 가만히 서있다 이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화장실로부터 멀어졌다. 코우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옷을 벗고 샤워기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줄기 속에 서있으며 생각했다. 지금은 16살이 아니었다.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과거를 굳이 들춰봤자 지나간 일의 슬픔에 잠겨 현실의 기쁨을 잃어버릴 뿐이었다. 그런 무의미한 행위는 필요가 없는데.

  코우지는 슬슬 궁금해졌다. 자신이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왜 이렇게 흘러간 과거에 절망해가면서 까지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하는지.

 

 

D-3

 

 

'코우지에게 용서받게... 아니 코우지가 마음의 짐을 털게 해주세요.'

 

 

  그는 미련했다. 하야미 히로는 미련한 사람이었다. 코우지는 웃음도 울음도 아닌 것이 섞인 숨을 헐떡이며 뱉어내고는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이기적이지 못해서 일어난 일임에도 본인은 끝까지 저를 위할 줄 모른다.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칭하며 몰아가는 것이었다.

  사실 저 모든 일은 처음부터 짐을 스스로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렇게 비틀어지지도 않을 것이었다. 조금만 솔직했다면. 분명 이것은 또 다른 원망이 됨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히로에게 왜 숨겼냐고, 말해주지 않았냐고 물어보려 했었다. 하지만 히로의 꾹 다물린 입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모든 일을 끝내버린 것이었다. 그가 뭐라하던 저는 하야미 히로라는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결국 오늘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급작스레 터져 나온 울음소리는 곤히 잠들었던 히로를 깨우고 말았다.

 

 

"코우지, 무슨 일 있어? 왜 울어?"

 

 

  히로는 눈에 서렸던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그 어느 때도 저렇게 아이같이 운 적 없는 그였건만. 히로는 코우지의 상태를 조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는 히로의 당황한 모습에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히로, 히로..."

 

 

  말이 나오질 않아 제 가슴을 툭툭 치며 울음을 흘려내었다. 코우지는 그저 히로의 어깨에 자신의 고개를 묻고는 히로를 부를 뿐이었다. 히로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등을 토닥였다. 코우지는 그 손길에 그만 더 크게 울고 말았다. 이 손길을 받고 싶었을 히로를 생각하며.

 

 

"코우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리광이야? 요즘 힘들어?"

 

 

  히로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소리로 물었다. 코우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핀트는 한참 엇나가 있었다. 고작 약간 많은 스케쥴이 힘들어 울만큼 나약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겪고 있는 이 기이한 일을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아니라는 변명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코우지는 울다말고 히로에게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히로. 히로는 내가 얼마나 좋아?"

 

 

  히로는 무슨 소리냐며 실없는 소리는 그만 하라고 하려 했으나 그의 표정을 보니 농담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나야, 코우지가 행복하다면 뭐든 좋을 만큼 좋지."

"나는, 히로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

"어..? 아, 응."

 

 

  히로는 당황한 듯이 가까스로 대답하였다.

하야미 히로는 미련하다. 코우지는 또 그렇게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보다도 우선인 것이 너무 많아 정작 저를 챙기지 않는다. 지금도 결국 스스로의 행복이라는 말 자체를 어색하게 느끼고 있었다. 코우지의 행복을 말할 때는 입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으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히로는 유독 제 행복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아마도 지금껏 행복이란 것 자체를 논해 볼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던 적이 없어서일까. 가끔 히로는 여유로운 일상을 불안해하였다.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눈에 잘 보이는 것을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코우지는 제 눈에 남은 눈물을 닦아내고는 히로를 꼭 안아주었다. 이 기나긴 아픔은 히로의 것만이 아니거늘, 지금껏 버텨온 것은 늘 그였다. 외면한 시간들 속에서 히로를 좀먹는 슬픔을 모른 채. 자신은 그렇게 살아온 것이었다. 이 꿈은 저를 비난하고 싶은 것일까.

아직도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D-2

 

 

'코우지가 보고 싶어요. 코우지를 돌려줘.'

 

  그것은 소원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뜨거운 울음이고 발악이었다. 19살의 하야미 히로는 깨달았던 것이다. 더는 소원 따위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결국 그는 바라는 것이 아닌 애원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닿을 줄 알았던 것들은 순식간에 다시 멀어지고 또 닿을 것 같으면 멀어지고. 그것은 희망고문이었다. 코우지는 저라도 그렇게 되면 아무런 자신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던 그 순간 히로는 울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히로가 제 앞에서 울었던 것이 몇 번이나 되었더라. 코우지는 세아려 보았으나 손에 꼽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멈추었다. 그는 늘 뒤에 이렇게 수많은 울음을 감추어두고는 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도.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더 보여 줄 수 없던 것일까.

  지금까지 그가 빌었던 크리스마스 소원의 결과는 어땠더라. 코우지는 천천히 다시 상기해보았다. 첫날의 꿈부터. 웃기게도 그것이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히로의 행복을 완성시켜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다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 중 이루어진 것조차 결국은 히로 스스로의 행복을 좀 갉아 먹은 것들뿐이었다.

 하야미 히로에게 기대는 절망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제는 코우지도 지쳐버렸다. 자신은 히로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수긍해야만 했다.

 

 

D-1

 

 

  코우지는 오늘은 아무런 말도 듣지 않은 채 눈을떴다. 그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20살의 크리스마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이 이브였으니까.

  코우지는 가벼워진 숨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이렇게 끝이 난 것이다. 이제는 더 그 소리를 들을 리가 없었다. 긴 열흘이었다. 얻은 것이라고는 착각에 대한 자각과 일말의 죄책감 덩어리뿐이었다. 무슨 이득이 있으라고 이런 시련을 내려준 것인지 몰랐다. 이런 마음 따위로 어떻게 히로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코우지는 스스로의 이기적임에 질려버렸다. 결국 이런 답답한 마음조차도 견뎌내지 못하고 버거워하는 것 자체가 그만치 저가 약하다는 증거였다. 히로는 이보다도 더 한 시간들을 견뎌왔을 텐데.

"코우지. 오늘은 일 일찍 끝나니까 빨리 와서 푹 쉬자. 내일은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어."

  불편한 코우지의 속내와는 정반대로 히로의 웃음은 해맑았다. 마치 한 점의 슬픔조차 없다는 듯이.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그는 마치 한 번도 슬퍼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슬픔에 절여질 정도로 아파하며 살아와놓고는.

 

 

"응. 그러자."

 

  코우지는 그런 히로의 모습에 맞춰주었다.

 

 

  코우지는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는 스케쥴과 틈틈이 생각나는 본인의 죄악감.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느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루의 일과가 끝나있었다. 코우지는 그제야 깨달았다. 요 내내 잠결에 들리는 꿈속의 목소리에 신경 쓰느라 정작 히로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지 못했다는 것을.

  물론 히로라면 다 괜찮다고 해주겠지만 문제는 코우지 자신의 마음이었다. 히로에게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었다. 애시당초 그러기 위하여 당긴 스케쥴이었다. 히로와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어 무리해가면서 까지 조정해 놓은 것이었는데, 정작 꿈 때문에 제대로 준비해놓은 것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히로의 목소리들이 저를 에워싸니 혼이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히로의 개인 스케쥴이 하나 더 있었기에 코우지는 일단 장을 봐 두기로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트를 한 바퀴 돌며 이것저것 잔뜩 카트에 담아버렸다. 히로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하고자 하니 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긴 기다림 끝에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그의 손에 들린 바구니는 한가득 차있었다. 코우지는 그 무거운 짐을 든 채 집으로 향하였다. 추운 겨울 거리는 크리스마스를 앞둬선지 인파로 북적였다. 모자를 더 짓눌러쓰고 걷다 문득 한 곳에 멈춰 섰다. 귀금속 상점이었다. 창가로 보이는 갖가지 보석들이 박혀 제 아름다움을 뽐내는 반지들이 코우지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반지는 사실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재작년에 이미 커플링을 맞춘 둘에게 다른 반지가 필요할까. 코우지는 제 손에 껴진 얇은 실버링을 보며 생각했다. 물론 히로의 손에는 더 화려한 반지가 잘 어울리겠지만. 어쨌든 히로는 저와의 커플링만을 끼고 다닐 것이었다. 새 커플링은 그에게 필요 없을 것이다. 물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화려한 반지 대신 실버링과의 추억으로 만족할 사람이었다. 코우지도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눈이 갔다. 한 눈에 띈 저 반지 디자인이 히로의 가는 손가락에 얼마나 잘 어울릴지. 그런 생각이 들어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분명 지나쳐야 하는데, 코우지는 또 제 이성이 말을 듣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면 이미 발은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

 

 

  히로가 환하게 웃으며 코우지의 앞에 잔을 내밀었다. 음료가 잔의 흔들림에 맞추어 찰랑거렸다. 코우지는 히로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답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이렇게 둘끼리 크리스마스 보내는 게 몇 년 만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작년은 코우지가 할리우드에 있었고 그 전년도는 오버레가 한창 자리를 잡아가느라 바빠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물론 그전은, 코우지는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게. 히로 오늘 많이 힘들었지? 오버레 스케쥴외에도 뭐 많았잖아."

 

 

  올 한해. 히로는 프리즘킹의 일로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나머지 둘보다 배는 더 바빴다. 그런 만큼 둘이 같이 보낼 시간은 더더욱 적었었다. 떨어진 시간들도 아깝건만 붙어 있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현실만이 들이닥쳐 괜히 애만 더 타버리곤 했다. 특히 12월은 집이 아니면 같이 보낼 시간이라곤 존재하지도 않았을 정도로 바빴다.

 

 

"코우지야 말로, 나야 늘 익숙하잖아 이런 거.“

히로가 가볍게 말했다. 코우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히로, 힘든 거에 익숙해지지 마."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히로의 말은 기쁘지 않았으니 말이다.

 

 

"히로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고, 또 조금 더 스스로에게 유해져야해. 왜 그렇게 항상 자신을 몰아 붙...여."

 

 

  이런 소리를 하고 싶은게 아닌데. 저도 모르게 나무라는 것 같아 말끝이 약간 흐려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뿐이었다. 코우지는 아차 싶었다. 저야 최근에 겪은 일이 있으니 그럴 법 하지만 히로는 하나도 모른 채 그저 갑자기 화난 자신을 마주한 것이 아닌가.

  히로는 코우지의 화에 약했다. 그는 그것을 올해 초에야 깨달았다.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싸늘함에 무너진 히로를 보고야 하야미 히로의 약한 부분을 마주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히로는 늘 약했다. 다만 누구 앞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노력해온 것인데. 그런 히로를 끝끝내 무너트렸다는 죄책감이 한동안 코우지를 짓눌러 버리고는 했다

 

 

"행복하지 않아 지는 날을 생각해야지. 언제나 행복할 수 없잖아."

히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코우지는 차마 그 어떤 말도 떨어지지 않았다. 행복하지 않는 날이 왜 오냐고 묻기엔 이미 저도 아는 것이다. 얼마나 히로에게 희망이란 덧없는 말이었던지.

"미안. 오늘 잔뜩 놀려고 했는데 기분 둘 다 안 좋은 거 보니 자야겠다. 피곤한가봐. 내일, 내일은 잔뜩 놀자."

 

 

  히로는 그 말을 끝으로 황급히 일어나 제 방에 가버렸다. 일방적인 회피였다. 싸우고 싶지 않아하는 히로는 늘 이렇게 피해버리고 말았다. 되도록 그럴 일을 안 만드는 편이지만, 가끔 이렇게 피해버리는 히로를 보면 괜히 속이 상한다.

히로의 방은 평소라면 늘 비워져있을 방이었건만 저 문을 열었다는 것은 오늘은 따로 자겠다는 의미였다. 혹시라도 나올 말을 피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올해 초 집을 마련할 때부터 형식사상으로 마련해둔 방이었다. 활동기간에는 가끔 잠의 패턴이 서로 다를 수도 있으니 방을 두개를 쓰자고 이야기해두었었다. 그러나 실제로 써본 것은 손에 꼽아도 몇 번이 되질 않았다. 두 사람은 늘 같은 침대를 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특히 오늘같이 다음날이 쉬는 날인 경우는 무조건 꼭 붙어 잤는데.

  아무래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가장 최악의 크리스마스가 될 모양이었다. 꿈을 꾼 것부터가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이렇게 기분이 나빠질 리는 없었을 텐데. 코우지는 정체모를 누군가를 원망하였다. 사실 원망할 대상 따위는 없는데도 말이다.

  코우지는 덩그러니 놓인 케잌을 치우려다 그냥 놔두고 방에 들어가 버렸다. 지금은 모든 것이 귀찮았다. 그저 이 순간의 막막함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라는 사실 자체를 잊고 싶은 심정이었다.

코우지는 방에 들어와 대충 와이셔츠만을 벗어 던졌다. 굳이 옷을 갈아입기도 귀찮아졌다. 침대에 몸을 푹 맡기자 허벅지 쪽의 무언가가 신경 쓰였다. 주머니 안에서 제 다리를 쿡쿡 찔러대는 묵직한 부피감이었다. 코우지는 아까 전 자신이 샀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선물도 제대로 주지 못했네.'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제일 기대했던 날은 그렇게 최악의 날로 끝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전부 그 다 수상쩍은 꿈들 때문이었다. 굳이 그런 것을 보여줘서는.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코우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들었다.

 

 

D-day

 

'코우지와의 행복만큼은 끝나지 않게 해주세요.'

 

 

  코우지는 번쩍 눈을 떴다. 히로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 옆은 싸늘하게 비어있었다. 그렇다면 또 꿈이란 소리였다. 하루를 건너뛰었으니 오늘이 20살의 크리스마스 소원. 그리고 지금도 20살의 크리스마스였다.

과거의 크리스마스 소원은 그렇다 쳐도 왜 지금의 소원까지? 히로가 제 귓가에 대고 속삭일 리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하루를 건너뛰고. 무슨 뜻일까. 저보고 어찌하란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나.

그 순간 코우지의 머릿속을 번뜩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는 가능하다. 어쩌면 과거를 보여준 것은 자신들의 현재를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을 수도. 코우지의 머릿 속이 그렇게 정립되자 코우지는 고민 할 것도 없이 일어섰다.

  자신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히로의 가장 간절한 바람이 그것이라면.

 

 

"히로, 히로,"

"으음... 코우지...?"

 

 

  코우지가 히로의 방으로 달려와 히로를 흔들어 깨웠다. 히로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직 잠이 덜깨 채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저를 깨운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히로는 코우지를 확인하고 나서 하품을 내뱉다 어젯밤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무슨 일이지. 히로의 등골에 불안함이 서렸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깨워서 할 말이 있다니. 설마 제게 지친것일까.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 어젯밤 그렇게 방에 들어오고 나서 몇 번이고 후회했다. 그렇게 나약한 말을 왜 뱉어서는. 이미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주워 담고 싶었다.

  히로는 코우지의 심각한 표정에 또 소원을 이뤄주지 않을 셈인가. 히로는 차라리 다시 눕고 싶었지만 이미 잠은 깨버렸다. 결국 피할 수 없었다.

 

 

"난, 히로가 항상 행복해 하고 불안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어제 히로의 이야길 듣고 나는 솔직히 충격 받았어. 내가 정말 히로에게 하나도 의지가 되지 않았던가 싶었고. 그래서 솔직히 수많은 생각이 들었어."

'헤어지자는 걸까.'

 

 

  히로는 어떻게 해야 최대한 그에게 괜찮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예전만큼 잘 참을 자신이 없었다. 강해 질줄 알았던 마음은 이제 너무 많이 나약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태연히 그를 보내줄 만큼 연기를 하기엔 감정이 너무 깊어져 버렸단 말이었다.

  코우지는 히로의 어깨를 꽉 잡고 침을 한번 삼키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히로, 결혼하자."

히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자신이 들은 말이 순간 환청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우지, 방금 뭐라고.."

"히로가 내 옆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결혼하자. 아니 나랑 결혼해줄래?"

 

 

  실없이 내뱉은 말이라고 치부하기엔 코우지의 목소리가 한없이 진지했다. 히로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코우지를 제대로 마주하였다. 코우지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만약 연애가 불안하다고 느낀다면 더 강한 끈으로 우리를 묶을 수 있다면 좋겠어. 물론 결혼이 영원치 않아 보일 수 있지는 않겠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단단한 끈이 그거라면 나는 그렇게 히로의 옆에 있고 싶어."

 

 

  코우지는 지금껏 자신이 히로의 옛 소원들을 하나씩 들어온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용기없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히로와의 수많은 일들을 겪고 불행을 모른 채 해왔던 자신과, 행복을 외면하던 히로. 둘 사이의 그 아슬한 줄타기의 종료를 위한 시간이었음을, 뒤늦게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불행을 마주해야 했으며 히로는 행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두 사람의 숙제였다.

  그리고 그 해결매듭을 신은 코우지에게 쥐여 주었다. 히로는 소원을 이루고 코우지는 히로에게 진짜 행복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행의 순환을 끊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행복해져도 돼?"

 히로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망설임과, 불안, 초조 들이 섞여있었다. 코우지는 히로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행복해져도 되는 게 아니라, 이제는 행복할 일만 남은거야. 히로. 돌고 돌아 이렇게 내 품에 도착했잖아."

 

 

 코우지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약간 꾸깃해진 상자를 꺼냈다. 자느라 짓눌린 흔적이 역력했다.

 

 

"좀 겉은 못생겨졌지만, 그래도 내용물은 예쁘니까 봐줘."

 

 

  코우지는 상자를 열어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히로의 왼손약지에 끼워주었다. 예쁜 보라색 사파이어가 영롱한 빛을 띈 채 히로의 손과 어우러졌다.

 

 

"코우지, 이건 언제 산거야..."

"어제. 사실 원래는 크리스마스 선물인데. 어제 못줬잖아. 그런데 역시 히로한테 새로운 커플링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대신 약혼반지로 쓰면 좋겠지?"

"응. 그럼 되겠다."

 

 

  히로는 고개를 팍 숙이고는 대답했다. 코우지는 그 말이 곧 수락임을 깨달았다. 히로가 제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그것이 슬픔이 아니란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히로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엉엉하고는 터트리고 말았다.

 

 

"흑 흐윽, 무서웠어. 내도록. 끅, 흑... 아무리 행복해지는 소원을 빌어도, 흡, 이루어진 적이 없어. 으허허엉."

 

 

  히로는 제 자신의 통곡하듯 우는 모습이 추할까 싶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폭삭 가린 채 눈물을 흘려댔다. 그의 눈물이 방울방울 이불을 적셔나갈 동안 코우지는 가만히 그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조금씩 눈물이 잦아들자 코우지는 히로의 손을 조심히 떼어냈다. 히로는 붉어진 눈가에 상기된 볼로 그를 바라보았다. 코우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하나씩 다 이뤄나가자. 올 해 소원부터. 이 행복이 끝나지 않게 해줄게."

 

 

  코우지가 히로의 약지에 입 맞추며 말했다. 히로의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어느 새 두 사람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하야미 히로, 20살의 크리스마스는 끊어지지 않는 행복을 울리는 종소리로 가득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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